루가 7:11-17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갔다.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 오늘의 묵상: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송나라 시대 불교 서적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말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은 '백 척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모든 시ㆍ공간의 세계를 만난다'라는 뜻입니다. 백 척 장대에 높이 올랐다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ㆍ공간을 넘는 모든 세계를 만나야 깨달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ㆍ공간의 제약을 받는 나는 언제나 제한된 속에서 나를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주장하며 제 고집을 피우고 살아갑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우상에 빠져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 삶의 끝을 마주하면 산다는 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합니다. 그러다 생사의 권한이 내게 없음을 알면 체념하거나 신적 도움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시간이 얼마이든, 최선을 다해서 참된 의미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내 삶의 참된 의미는 무엇이고 내 생사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복음성가 중에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든 시ㆍ공간의 세계가 주님 것이고 나 또한 주님의 것이니 주님 안에 있는 나는 육의 생사를 넘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저에게 죽음이라는 백 척 장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말씀해 주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 오늘의 기도
생명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부활 생명의 소망을 갖게 하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 삶에 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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