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49:10, 15
내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이끌어주고 샘이 솟는 곳으로 인도해 주리라.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요한 5:30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 판은 올바르다.
# 오늘의 묵상: 두 방향 거울
1독서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사랑스러운 구절 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섬세한 은유적 표현들을 읽고 있노라면, 글쓴이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수염 더부룩한 예언자보다는 노르위치의 줄리안(14세기 영국의 여성 영성가)이나 리지외의 테레사(19세기 프랑스의 여성 영성가)가 더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 더러 “어서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캄캄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 안전하니 “나와서 몸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9절).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머니가 자궁 속에 아기를 품듯, 그런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어제 우리가 만난 치유의 이미지들이 오늘 본문 안에서도 계속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안에서도 계속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차례의 “거울 비추기(mirroring)”를 발견합니다. (1)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심지어는“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시며 자기를 하느님과 “같다”고 감히 말합니다. 이에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합니다(17-18절).
(2)그리고 지금 묵상집을 읽고 있는 우리들을 비추어주시는 “아들, 예수님” 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입니다(21절). 따라서 그 아들은 하느님과 우리 양방향을 모두 비추는 양면거울과 같습니다. (3)또한 우리가 자신을 왜곡된 거울에 비추어 보기를 멈추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 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22절). 그리고 아들은 우리들이 “단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십니다(24절). 이 은총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반영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을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단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몇몇 구절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행히도 염려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심판’과 ‘단죄’라는 소리만 맴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 전체를 하느님과 그 아들의 빛 안 에서 읽어보십시오. 하느님은 긍정의 거울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과 우리 사이 에서 양방향 거울이 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흠숭하는 것은 거룩한 거울에 비추어진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완전하고 연민어린 거룩한 거울(Divine mirror)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진실한 재판관이며 최고의 친구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약간의 충고를 덧붙이자면 성서에서 '심판(judgment)'이라는 단어를 읽을때마다, 거룩한 거울에 '비추어지다(mirrored)'라는 단어를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진리에 훨씬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 오늘의 기도
심판의 하느님, 한때 당신을 두려워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어머니처럼 내게 다가오셨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당신의 웃는 얼굴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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