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8:51, 54-55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너희는 말로만 '너희' 하느님이라고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 영광의 반영을 믿지도 용납하지도 않고있다.")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반영을 온전히 믿고 받아 비춘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것이다.
# 오늘의 묵상: 모든 영광은 하느님 광채의 반영
창세기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난 것을 묵상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99세였습니다. 그의 첫 소명(부름받음)이 이렇게 세 번째 반복되고 있는데, 반복될 때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맺는 관계와 “계약”의 의미에 대해 약간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 관계를 주도하고 초청하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시지만, 그것이 반드시 쌍방적인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횟수를 더할수록 아브라함에게 조금씩 더 요청하는 것이 늘어갑니다. 그의 땅과 집안을 떠날 것(12:1-2), 동물 희생 제사(15:9- 1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할례(17:9-14),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믿음(17:16하)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웃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쌍방적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권투장(복싱링)에 넣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한 자리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주고받는 거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적 목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필요조건”(무엇을 얻으려면 무엇을 준수해야 한다는)으로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당신 종교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 교단에서 금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젊은 부자가 한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영생을 얻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모든 인간관계는 쌍방적이기에 (부모-자식 관계가 가장 덜 쌍방적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경험을 그런 구조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거의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완전하신 부모(하느님)가 당신 자식을 어떻게 무한히(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이 선조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계속 불성실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사랑이 야훼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꾸준히 이행하십니다. 노아, 다윗, 예레미야의 예언,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과 맺은 “새로운 계약”에 이르도록 부르신, 이 일련의 계약들을 다 읽기 전까지 저는 이 경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각 시기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커다란 비밀 안에 거하게 하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약속을 행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살아있는 아이콘이 되셨으며, 하느님께서는 늘 사랑을 행하셨고, 그것을 항상 받은 것은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보혈이 든 잔을” 줄 때마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 본문을 읽는데 기초와 배경지식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와 옳은 관계에 서 계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영광” 을 받습니다. 그 영광은 반사하는(빛을 받아 비치는)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요하지 않고, 지속적이며, 무한하며, 하나의 근원(하느님)에서 오는 영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 이며, 그분은 우리도 그것을 지닐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연결이 생겨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반영하고 계시며,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영광을 받아 세상에 비추도록 초청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받는 빛의 반사, 주어진 영광, 하느님 쪽에서 비쳐 오며 사라지지 않는 일방적 선물입니다.” (여기서는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정체, 우리의 진정한 자아(하느님), 하느님께로부터 온 우리의 “광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다 온전하게 받아 반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위대한 나다(I AM, 모세에게 나타내신 하느님의 이름)라고 오늘 복음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8:58).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자신들 안에 머무시는 영광을 보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미워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자기멸시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핵심적인 이 구절을 위하여, 본문에 저의 주석을 담았습니다.
# 오늘의 기도
나의 하느님, 이 신비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나이다. 이 일이 저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께서 보신 것을 저도 보게 하소서. 너와 우리 모두가 영원하신 영광(하느님)의 반영들임을 깨닫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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