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9:13-15
그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 곳을 떠나셨다.
# 오늘의 묵상: 함께 축복받는 사회
공간은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은 맛을 만듭니다. 나지막한 한옥골목의 조용한 서촌동네는 시골 정지간 어머니의 손맛을 그립게 하고, 거제도 외할머니집 앞 동구나무 그늘을 떠올리게 합니다.
2025년의 봄이 아직 이르던 즈음, 서촌의 공간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짙어지는 거리를 갖가지 빛들이 밝혔습니다. 마저 떠나지 못한 겨울의 냉기가 머물던 아스팔트를 꼭꼭 붙어 앉은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녹였습니다. 사람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을 위해 숙연히 새 역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50년지기 친구 여덟 명이 오랜 인연이 있는 서촌 맛집에서 모이기로 했던 6월의 주말, 마침 청와대로 향하는 골목에는 차별 금지를 위한 시위 집회로 차량통제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자연스레 바깥의 시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소속은 각자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인 친구들은 성소수자에 관해 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도덕적 문란은 순식간일 것이며 가족의 파괴로 우리 사회가 멸망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우려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북유럽 여행에서 남녀공용 공공화장실 앞에 남녀 구별 없이 자연스럽게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차별 금지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이 최고의 인권이 보장 되는 복지국가로 행복지수가 가장 높기도 합니다. 본질은 사람에 대한 편견 없는 이 해와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린이는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회적 편견과 법적인 소외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는 누구일까요? 6월의 굵은 장맛비가 그들의 마음속 눈물 같았습니다. 비에 젖어 구겨지고 쭈그러진 구호 팻말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 같았습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그러셨던 늘 약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먼저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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