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7:48-49, 53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 ”그리고 나서 사람들 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 오늘의 묵상: 모든 논란은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해결 될 수 있는가?
사순절기의 마지막 주간에 가까워지면 올가미는 더욱 조여듭니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어떻게 자신의 영혼에 도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기도로 옮겨 갈 수 있는지, 어떻게 더 나은 본성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선택하는 쉽고 편안한 대응은 오래된 경전을 인용하고 당국이나 법적근거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신속하게 누그러뜨립니다. 근본주의자들은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모든 문제들이 해결 수 있다.’ 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내면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의 여정을 통과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실제로 체험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다른 누구에게 떠넘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더 높은 자리의 누군가가 해결해 줄 테니, 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필요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서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향해 뒷걸음치는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식상한 방식이지만, 예레미야와 똑같은 핍박 아래 놓인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복음서 말씀에 이르러 더욱 명확해집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단락은 오로지 권위에 대한 논쟁, “당신은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 합니다. 곧, 누구를 믿고 따를 것인가? 적절한 성서구절은 어느 것인가? 무엇이 올바른 성서 해석인가? 당신은 어떤 집단을 대변하는가? 우리에게 충성하는가? 아니면 갈릴래아에 속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안심시키기 위함이며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편견에 눈먼 자들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슬프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정치와 종교, 또는 문화 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씁쓸히 마무리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독선과 무지 속에 머무르고 맙니다. “더 폭넓은 지혜로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내게는 나만의 좁은 진리가 있으니까 말이오.”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의 면전에 놓여있는 것들을 읽거나 보려들지 않습니다. 각자 집에 들어앉아 자기만의 권위를 인용하면 그만이니까요.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저속한 잡지, 가십거리, 왜곡된 비난과 야유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오늘 읽은 복음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기도
하느님, 모든 권위가 당신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아무런 위로가 없고 시시각각 외로움이 밀려들때, 오직 주님께 저의 믿음을 두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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