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 47:4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무릎에 찼다.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건너라고 하기 에 건너보니 물이 허리에 찼다. ”
요한 5:7, 9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 오늘의 묵상: 영혼은 형상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삶은 순간들, 우연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들로 만들어집니다. 예술, 그림, 전기, 비유, 이야기들은 우리의 믿음체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매우 빠르고 깊은 영향력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떤 개념과 지식의 작용보다 우리의 무의식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우리의 다양한 경험들을 함께 묶어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처를 감싸주고 치료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물론 성서에게 하느님과 진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킬 치유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을 선물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성서의 이미지들 중에서 치유의 상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물’ 입니다. 우리는 오늘 두 개의 독서에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에제키엘은 생명과 풍성함의 근원으로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제시합니다.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리게 된다.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에제 47:9)”여기에서 하느님의 풍성함과 우주적인 양육의 가장 탁월한 이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치유하는 물의 이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치유의 능력이 있는 그 물은 베짜타(혹은 베데스다, “자비의 집”)라고 불립니다.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로 치유의 물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 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치유되어야만 하는 진정한 “죄”이고 비극입니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연못에 나를 담가줄 사람이 없어요. 내가 거기에 닿으려고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를 제끼고 거기에 들어가지요. ”그래서 그는 38년 동안이나 이 말을 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치유의 명령이 아니라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를 격려하고, 중풍병자가 잊고 있었던 그 자신의 힘을 되돌려 줍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미지를 그려 줍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참모습을 비추어 줌으로써 그의 자아를 되돌려 줍니다, 이것이 주님이 치유하시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선과 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누군가를 온전하게 비추어주는 일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완전한 ‘비추어주기’는 더 깊은 관계 맺기와 책임감을 수반합니다.
그는 그 사내에게 자신의 장애에 등을 돌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나쁜 것이 당신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져야만 하는 새롭고 위험한 세계로 던져질 때, 그리고 우리가 용감하게 우리 자신의 삶과 직면할 때,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처럼 정직한 인도자는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직면하라고 말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을 잘 돌보라”고, “당신의 거짓 자아로 자신을 채워 넣으라”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같은 치유와 변화는 개인들 뿐만 아니라 제도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나라와 사회, 나아가 교회를 바라보면, 우리는 너무 자주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직면을 외면합니다. 정직한 직면을 통한 격려와 인도보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미래를 위해서 바칠 희생제물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치유하는 이미지들, 우리가 우리 최선의 것을 그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과 언제나 부글거리는 신비한 자비의 연못으로 우리를 초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38년”도 훨씬 넘게 영적인 유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 오늘의 기도
치유의 하느님, 저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 서. 가장 큰 죄는 성장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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