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0:33,36
유다인들은“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 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 오늘의 묵상: 언어가 가지는 이분법적 한계에도 경험은 항상 톻합적입니다
오늘의 이 두 독서는 종교의 본성,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들이 범하는 최악의 실수가 무엇인지 그려 보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항상 말과 언어가 실재라고 혼동하는데,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 우리 가운데 사신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첫 번째 독서를 읽고 있노라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마치 편집증적 망상증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나의 친구였던 자들이 모두 다 내가 잘못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저 놈이 제가 뱉은 말에 걸려들겠지. 그러면 그 때 우리가 눌러 버리자’ 라고 저들은 나를 노리고 있구나.” 계속 읽어 나가다 보면 예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과 똑같이 나쁜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느님께 간청하기를, 그들에게 복수의 일격을 가하고, 그들이 평생 잊지 못할 수치와 굴욕감을 느끼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내가 지켜 볼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 성서구절들은 예레미야가 수준 높은 영감을 받은 글도, 영감을 주는 글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내면에서 일고 있는 불안과 들끓는 복수심, 그리고 자기 정당 성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자기 자신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 또한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긴다는 죄목으로” 공격을 받고, 당시 종교적 범죄자들을 처벌하던 돌로 치는 사형 형벌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발 내용에 대하여 부인하시지 않고 “나의 선고를 들어라. 너희가 비록 신들이요 모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나 그러나 너희는 보통 인간처럼 죽겠고 여느 군주처럼 넘어지리라.(시편 82:6-7)”는 말씀을 인용하며 그들도 당신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의 율법을 읽어 보면 ‘나는 너희를 신들이라고 불렀다’ 라고 쓰여져 있지 않는가? 이 말씀이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에게 반포된 것이며, 성서의 기록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너희는 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느냐?”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담하고 비이분법적인 외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과 일치함을, 그리고 그들도 당신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내 안에 계시다(10:38).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 당신의 말씀을 증언하는 가시적인 증거로써, 그들과 같은 인류의 일원으로서 우뚝 서 계십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너희도 그럴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명확하고 위엄에 넘치는 초청의 말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진리이며 좋은 말씀이지만, 그것은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려”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에 관한 메시지들이 부정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체포된 수많은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 오늘의 기도
좋으신 하느님, 당신 자신을 주시면서 어려운 시간을 지나신 것은 무엇때문이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본성을 우리와 나누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용납하지 못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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