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 18:21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마태 5:21-22
“‘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 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 오늘의 묵상: 보상과 처벌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동양사상 ‘업보(카르마 karma)’ 를 이교도적이고 숙명론적이며 비성서적이라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말 합니다. 오늘의 두 본문이 좋은 예가 됩니다. 보통, 업보의 개념은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 서도 인과응보의 개념은 유효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좋은 열매로 돌아오기도 하고 파괴의 씨앗을 잉태 하기도 합니다. 긴 안목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이는 언제나 진실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기원전 6세기 당시 유대인들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과 벌의 개념을 모두 현재의 문제,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때까지 인간의 의식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확연한 구별이 없었고 처벌이나 보상 역시 개인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내려진다는 개념이 강하였습니다. 당연히 아직 개인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각각의 인간영혼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커다란 진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제키엘은 강하고 큰 소리로 각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 개인적인 결정과 선택이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소중합니다. 당신의 있는 그대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이 소중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에제키엘 예언서를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상과 처벌의 개념을 에제키엘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 각자의 내면문제로 다가가십니다. 인간의 의식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힘입어, 옳고 그름이라는 외부규율들을 준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내면의 태도와 동기, 판단과 생각의 문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내면이 더럽고 부정하면 당신은 이미 ‘게헨나’(옛 예루살렘의 꺼지지 않는 쓰레기 소각장 혹은 지옥, 고난의 땅)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직자나 신학자가 아니어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산다면” 여러분은“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처벌의 위협이나 상급의 약속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에 있어 개인의 책임과 의식, 그리고 자유의지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초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 오늘의 기도
창조주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제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여받고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 진실입니까? 제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소망할 수 있을 만큼 저를 높여주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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